20210610 말하지 않은 이야기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겪어도 되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으며 자랐다. 기억력이라도 좋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운이 나쁘게도 그렇지 못해서 나쁜 기억이 차곡차곡 쌓였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한번 겪어볼까 말까 한 일들이 나에게 자꾸 일어나는 걸 경험하면서 '누군가가 겪어야 할 불행을 내가 대신 겪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죽을 것 같은데 딱 죽지 않게끔만 살려주도록, 누군가가 조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라면서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아, 내 삶은 이런 결인가 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역시 그렇구나. 끄덕끄덕.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았고,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났고, 자꾸 어딘가 아팠다.
인정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생각뿐이었던 모양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갉아먹히고 있는 줄 나는 몰랐고 2017년,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상담을 받았다. 내 머리가 기억하고 있는 첫 번째 불행부터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괜찮은 줄 알았던 마음이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오열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아이의 상태가 이상하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도통 자기 이야기를 안 하는 딸이 꺼내놓는 말을 듣고 어머니께서 많이 놀라셨다. 한동안은 상담을 다녀올 때마다 눈두덩이가 터질 것처럼 부어있었다.
치료를 받았다. 더 이상 산다고 뭐 달라질 인생일까 싶었지만 나는 말년에 잘 될 사주라던데(사주를 보면 어디에서나 그렇게 나왔다. 우습지만 믿지 않으면서도 믿고 싶은 게 사주 아니던가. 좋은 말 한정이지만). 그 말년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싶었다. 그냥. 억울했다. 사는 동안 좋은 기억은 찰나였고 내내 불행했으니까. 난 내가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행복하길 바라는 건 누가 뭐래도 나 자신이다.
치료를 받기 시작한 다음 해부터 나는 놀랍게도 많이 나아졌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사실은 괜찮지 않다는 걸 알고 바로 대응을 했다면, 애초에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거라 지금은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나름 최선을 다 한 것일 거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진짜'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짝꿍을 만나면서 더욱더 좋아졌다. 주변 사람들이 달라졌다고 말할 만큼.
우울증이 왔을 때 그 회색의 세상을 안다. 파란 하늘도, 눈부신 노을도, 반짝이는 달빛도 보이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혼자 나올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벌써 빠져나올 수 있었을 거라는 것. 누구나 이렇게 사는데 뭐,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딨어하지 말고, 남들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빨리 깨달아 빠져나오기 위해서 무엇이든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살려달라고 외치든 전문가의 도움을 받든. 당신의 인생이 행복하길 가장 바라는 사람은 어쨌든 당신이니까.
힘내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다. 그게 얼마나 힘든 말인지 아니까. 지금도 겨우겨우 쥐어짜며 힘을 내고 있는데 얼마큼 더 힘을 내라는 건지 알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힘을 빼고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
매일 행복할 수는 없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니까.
하지만 해피엔딩을 위해서. 결국은 행복했구나 하며 마지막엔 웃을 수 있도록. 응원을 보낸다.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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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 vales bene, valeo.
그대가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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